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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 to the world

동시대 조선과 서구 유럽, 누가 더 민주적이었을까?

by cocori 202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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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우연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속도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나라 중 하나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왕정 체제였던 이 땅에서, 군사 정권과 권위주의를 넘어 촛불 혁명으로까지 이어진 강력한 시민 의식이 발휘된 것은 국제 사회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단순히 외부의 제도 수입이나 정치적 우연의 산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뿌리는 이 땅의 유구한 역사 속, 특히 조선 시대의 정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 민주주의 지수 지도 - 위키백과

유럽의 절대왕정, 참여 없는 통치의 시대

17세기에서 18세기 유럽은 절대왕정의 전성기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선언하며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왕이 독점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왕권신수설에 근거해 왕의 권력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겼고, 귀족과 시민은 정치 참여는커녕 왕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구조였다. 의회는 존재했지만 왕의 지배를 제도적으로 정당화하는 기구에 불과했고,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극히 제한되었다.

조선의 민본주의, 제한적이지만 뚜렷한 참여의 흔적

같은 시기 조선은 유교적 통치이념에 기반한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 권력은 일정 부분 제도적으로 견제되었고, 정치적 도덕성과 백성의 여론에 대한 책임이 강하게 요구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왕조실록’이라는 기록 시스템이다. 조선의 왕은 매일 국정 활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감시를 받았고, 사관의 기록은 왕조실록으로 편찬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왕은 사관을 내쫓거나 기록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발언과 행적이 후대에 어떻게 남겨질지를 의식하며 정사를 펼쳐야 했다. 이는 현대의 투명 행정과 기록 민주주의에 가까운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은 백성이 억울함을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제도도 운영했다. 신문고 제도는 백성이 궁궐 앞 북을 쳐 왕에게 직접 탄원할 수 있게 한 장치로, 영조 시대에는 이를 복원하여 다시 시행하였다. 이는 당대 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구조로, 오늘날 청원 제도의 전통적 전신으로도 볼 수 있다.

언론 기능을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 등도 존재했다. 이들 기관은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고, 언로의 폐쇄를 경계했다. 물론 실제로 이들이 항상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정치적 파벌과 억압의 한계도 있었지만, 제도적 존재 자체는 권력 견제의 씨앗으로 기능했다.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조선의 상대적 개방성

조선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대 유럽의 절대군주제와 비교할 때, 조선은 보다 복합적인 권력 견제 구조와 백성을 향한 정치적 책임의식을 내포한 체제였다. 단일 군주의 절대권력이 정치·종교·사상의 전 분야를 장악했던 유럽과는 달리, 조선의 정치문화는 권력에 대한 일정한 제한, 민의 수렴, 기록을 통한 감시라는 요소들을 제도적으로 담아내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이 표는 17~18세기 동시기 조선 왕조와 유럽 대륙의 대표적인 절대왕정 국가들을 비교한 것입니다. 목적은 조선이 비서구 국가임에도 정치 참여와 권력 견제에 대한 제도적 시도를 갖고 있었음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항목 조선 왕조 유럽 절대왕정(17세기 영국은 별도평가)
통치 철학 유교적 민본주의.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보는 정치 윤리 강조 왕권신수설. 군주의 권위는 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이념에 기반
백성의 목소리 수렴 제도 상소 제도(관리 대상), 신문고 제도(백성 대상) 등 형식적이나마 의견 개진 창구 존재 일반 민중의 정치 참여는 극히 제한적이며, 귀족과 성직자 중심의 권력 구조
권력 견제 장치 사헌부·사간원·홍문관(삼사)에 의한 권력 감시 기능. 왕의 언행을 실시간 기록하는 사관 제도 존재 국왕 중심의 권력 집중. 제후나 의회 등의 견제는 일부 국가에서 제한적으로 존재하나 실질적 제약은 적음
기록과 투명성 조선왕조실록 등 국정 전반에 대한 일관된 사료 축적. 사관이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위치에서 기록 군주의 명예를 위한 미화된 연대기 중심 기록. 정치적 정당화를 위한 문서화 경향 강함
관료 등용 방식 과거제를 통한 성과 기반 관료 등용. 양반 중심이지만 제도적으로는 신분상승 가능성 열려 있음 귀족 중심의 세습적 관직 임명. 가문 출신이 관료 등용에 결정적인 영향
이 비교는 조선이 서구보다 “더 민주적”이었다는 단정이 아니라, 조선 내부에 일정 수준의 정치적 참여와 견제 장치가 제도적으로 존재했음을 조명하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상소나 삼사 제도는 시대와 국왕의 성향에 따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백성의 직접적 정치 참여는 여전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유럽의 경우도 국가별 차이가 컸으며, 영국은 조기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예외적 사례입니다. 이 표는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대륙의 대표적인 절대왕정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비교입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역사적 토양 위에 꽃피운 결과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는 도입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을 비롯한 시민의 직접 행동은 짧은 시간 안에 제도와 현실을 일치시키는 힘을 보여주었다. 이는 단지 외세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기보다는, 한국인의 정치문화 속에 이미 내재된 “권력은 감시받아야 하며, 민의는 반영되어야 한다”는 오랜 전통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의 정치체제는 완전한 민주주의라 할 수는 없지만, 견제와 기록, 민의의 반영이라는 요소를 부분적으로나마 내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해방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식 속에 무형의 자산으로 남아 있었고, 결국 세계적으로도 빠른 속도의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결론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이식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이며, 기억이며, 정치적 전통이다. 조선은 그 정치제도 안에 이미 민주주의적 요소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당대 유럽과 비교할 때, 조선이 더 민주적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조선 역시 제한적이나마 민의 수렴과 권력 견제, 투명 행정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유럽에서도 보편적이지 않은 제도적 특징이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급속한 정착은 그러한 역사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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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ch Was More Democratic in the Same Era: Joseon or Western Europe?

 

Which Was More Democratic in the Same Era: Joseon or Western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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