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냉장고 덕분에 우리는 언제든 얼음을 만들고 차가운 음료를 즐깁니다. 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옛날, 특히 한여름에 얼음을 먹는 일은 일종의 사치였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조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겨울에 얻은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켜 이용했습니다. 그 대표가 바로 석빙고(石氷庫) 입니다.
석빙고란?
석빙고는 겨울에 강이나 하천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하던 돌로 만든 얼음창고입니다. 현대 냉장고처럼 얼음을 직접 만드는 기계는 아니고, 겨울에 만든 얼음을 오랫동안 보관하여 여름에 꺼내 쓰는 저장고였죠.
석빙고 외에 옛기록에는 나무로 만든 목빙고도 있었지만, 현재는 목빙고는 남아있지 않고 돌로 만든 석빙고만 일부 남아있습니다.
역사적 기록 — 언제부터 있었나
- 삼국시대: 『삼국유사』에는 신라 유리왕(유리이사금, 신라 3대) 때 얼음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 신라: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때 관청에 얼음을 보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국가 차원의 얼음 보관 관행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고려시대: 관청이 얼음을 저장해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 조선시대: 동·서빙고(한강 주변)와 궁궐의 내빙고 등 공식적인 빙고가 운영되었고, 얼음은 주로 왕실에서 사용되었으나 반빙제도(頒氷制度)를 통해 관료·환자·죄수 등에게도 때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표적 석빙고 — 오늘 남아 있는 유적들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든 것들입니다. 주요 유적으로는 다음이 있습니다.
- 경주 석빙고 — 반월성 안에 위치. 규모와 축조 기법 면에서 가장 뛰어나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음. 내부 구조와 배수·환기 설계가 탁월합니다.
- 청도 석빙고 — 경북 청도읍성 안에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함.
- 안동 석빙고 — 하회마을 근처에 위치, 반원형 천장 등 독특한 구조적 특징이 있음.
- 현풍 석빙고 — 대구 달성군(현풍)에 있는 석빙고로, 18세기 후반 축조된 사례로 알려짐.
- 창녕 석빙고 — 경남 창녕에 있으며 내부의 경사와 배수 구조가 효율적임.
- 영산 석빙고 — 전남 영산포 지역의 대표 석빙고.
(참고:용산구의 ‘서빙고’라는 지명은 실제 빙고가 있었음을 지명으로 남긴 예입니다.)
구조와 설계 — 왜 얼음이 녹지 않았나
석빙고가 여름까지 얼음을 보관할 수 있었던 핵심은 구조 설계 + 재료 사용 + 운영 방식의 결합입니다.
- 반(半)지하 구조
석빙고는 절반은 지하에 묻히고 절반은 지상에 노출되는 형태가 많았습니다. 지중(地中)은 기온 변화가 작아 내부 온도를 안정시키는 데 유리합니다. - 반원형(아치형) 지붕
지붕을 반원형으로 만든 것은 구조적 안정성뿐 아니라 내부 공기 흐름과 열 분산에 유리했습니다. - 바닥 경사와 배수 설계
내부 바닥을 경사로 해 녹은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게 해 습기가 머무르지 않도록 했습니다. - 입구 방향과 환기구(통풍구)
입구는 주로 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에 두어 내부 공기 순환을 확보했습니다. 지붕이나 상부에는 환기구가 3개 있는 구조가 전해지며, 이는 따뜻한 공기를 위로 배출하고 차가운 공기를 아래에 머물게 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 천장·벽·지붕의 재료와 덮개
내부 천장은 화강암 등 석재로 마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두꺼운 석재는 열용량(thermal mass) 이 커 낮 동안 외부열을 흡수·완충해 내부 온도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지붕 위에는 흙을 덮고 그 위에 잔디를 심어 햇빛과 복사열을 차단했습니다. - 천연 단열층(볏짚·왕겨·갈대 등)
얼음과 얼음 사이, 벽과 천장 사이에는 볏짚·왕겨·갈대 등을 넣어 열전달을 차단했습니다. 많은 공기층을 포함한 이런 자연 단열재는 열이 직접 전달되는 것을 막아 보관 기간을 늘려주었습니다. - 내부 접근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돌계단을 만들어 인원이 직접 들여놓고 꺼낼 수 있게 했습니다. - 이 모든 설계가 결합되어 석빙고 속 얼음은 한여름에도 비교적 오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채빙(採氷)과 운반 과정을 자세히 — 누가, 어떻게 옮겼나
채빙 (겨울 작업)
- 얼음은 1월~2월, 강물이 가장 두껍게 얼었을 때 채취했습니다.
- 얼음은 가로 약 1m, 세로 70~80cm 크기로 잘라냈고, 두께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수십 cm였습니다.
- 표면의 눈과 불순물을 제거한 뒤 톱·끌·쇠갈고리 등으로 잘라 ‘빙괴’로 만들었습니다.
운반 도구와 방법
- 썰매(빙썰매): 얼음 위나 눈 덮인 길에서는 썰매를 이용해 미끄러지듯 운반.
- 소·말이 끄는 수레(마차): 얼음이 강가에서 떨어진 석빙고까지는 마차를 이용해 육로 운반.
- 임시 경사로(런웨이): 석빙고 입구까지 얼음을 굴리거나 미끄러뜨려서 넣기 위한 경사로를 설치.
- 포장과 보호: 운반 중 얼음이 부식·마모되지 않도록 볏짚·천 등으로 덮어 보호.
- 인력 동원: 채빙·운반은 지방 관청의 명령으로 많은 장정(노동자)이 동원되어 집단작업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적재 방식
- 석빙고 바닥에 볏짚을 깔고 얼음을 차곡차곡 쌓은 뒤, 얼음 사이사이에 볏짚·왕겨·갈대를 채워 단열층을 만들었습니다.
- 공기 흐름과 배수를 고려해 쌓아 내부 열교환을 최소화했습니다.
석빙고의 사회적 의미 — 반빙제도와 이용처
석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주로 왕실 연회·의례, 약재 보관, 귀빈 접대 등에 사용되었으며, 필요할 때는 관리들에게 하사하거나 병자·죄수에게 지급하는 등 공적 자원으로 운용되었습니다. 국가가 주도해 채빙·저장·분배를 관리한 점이 석빙고의 중요한 사회적 특징입니다.
세계 비교 — 유사 시설들
석빙고와 유사한 얼음 저장 시설은 전 세계에 있었습니다. 일본의 히무로(氷室), 중국의 빙실(氷室), 유럽의 ice house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석빙고는 지역 기후와 재료, 국가 운영 체계에 맞춘 독자적 설계와 관리 방식으로 특별성을 지닙니다.
마무리 — 얼음 한 덩이에 담긴 지혜
석빙고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물리(열·공기 흐름), 건축(구조·재료), 물류(채빙·운반), 제도(반빙제도) 가 결합된 종합 시스템이었습니다. 겨울 강에서 얼음을 캐고, 썰매와 마차로 운반해 반지하 돌창고에 쌓아 여름에 꺼내 쓴 조상들의 지혜와 땀은 오늘날 우리가 쉽게 얻는 얼음 한 조각 뒤에 놓인 긴 이야기입니다.
영문 번역본 보러가기
The Ice Storage Legacy of Korea — The Stone Icehouse (Seokbinggo)
The Ice Storage Legacy of Korea — The Stone Icehouse (Seokbinggo)
Sharing intuitive insights and thought-provoking views that deepen understanding, and unveiling Korea’s hidden cultural and historical ri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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